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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esday, September 11, 2012

북한 복음화에 일생을 건 최광 선교사님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정말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누릴 누리고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먹고 입고 쓴다 할지라도 저는 만족합니다. 이제 저의 남은 생명은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최광 선교사. 북한 선교에 서원하며.)

열방빛교회는 지난 2003 4 11 탈북자들이 주도해 세우게 됐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에서 정처를 찾지 못해 할일없이 교회로 모여드는 여느 탈북자들과는 달랐다. 이들 하나하나가 북한 선교와 탈북자 선교에 비전을 품고 말씀으로 무장된 하나님의 강한 군대였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엔 이들과 3 이상 동고동락하며 삶과 말씀으로 예수를 증거한 최광 선교사(49) 있었다.



[북한 선교의 시작]



선교사는 신대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98 8 8 중국땅에 발을 내디뎌 우연히 탈북자 5명과 합숙하며 함께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서 뜻하지 않던 탈북자 선교를 시작했다. 개강 준비를 위해 한국에 돌아왔는데 몸과 마음이 그렇게 힘들더란다. 그래서 1년만 휴학하고 북한 선교를 해보라는 선교사의 권유로 그는 다시 중국땅을 밟게 됐다.



"그런데 중국으로 돌아가 탈북자 형제들을 만나 얘길 했더니 글쎄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는 겁니다. 알고 보니까 자기들이 제가 다시 돌아오도록 금식 기도를 했다는 거에요.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니 신뢰가 간다나요. 쫓기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동고동락 해주는 좋았나 봅니다"



1년으로 잡았던 선교 기간이 2년이 되고 3년이 됐다. 기간동안 그는 완전히 북한 사람들에게 빠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됐다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그는 선교 기간동안 성격도 말투도 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가 전도한 이들은 저를 '수령님'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하며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친근하면서도 확고한 모습으로 복음을 전해 .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선교사의 전도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성경을 신약은 하루에 걸쳐, 구약은 사흘에 걸쳐 일독하는 속도로 10개월 동안 신약 100, 구약 20, 성경구절 500 암송을 하고 남는 시간 동안은 기도하는 맹훈련을 시킨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어렵고 악한 환경 가운데 살아왔기에 잔인하고 무자비하던 그들이 놀랍게 변화된다는 .



"그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쉬는 시간을 주면 싸우기만 해서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감당할 방법은 그것뿐이었죠. 그렇게 30~40독을 하고 나니 오히려 자유시간을 줘도 지겹다며 성경통독을 하자고 하더군요. 개월만 그렇게 하면 설교도 다들 능수능란하게 합니다"



98 8월부터 그렇게 훈련받아 성경통독 등의 교육과정을 마친 사람들은 1기가 됐다. 선교사는 이들을 내보내 각자 탈북자들을 전도해서 2기를 양성하고, 이들이 3, 4기를 양성하게 하며 사역을 확장해나갔다. 그렇게 해서 어느새 그의 장막엔 350 명의 사람들이 1기부터 4기까지 350 명의 사람들이 거쳐갔다. 대부분이 확고한 신앙고백을 가졌을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도 수료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많은 이들을 감당하기가 힘에 부쳐 가족들도 중국으로 부르게 된다.


"인간적으로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하나님의 일이 귀하게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며 가족들도 저를 많이 이해해주었고 기도도 해줬습니다. 4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학교를 한창 다니고 감수성이 풍부할 때라 처음엔 힘들어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아이들까지 책임져주셔서 모두 자라나고 있습니다"


[위기와 시련, 그러나 역사를 쓰신 하나님]



그렇게 끊임없이 선교의 장막을 넓혀가던 그들에게 시련이 닥쳤다. 2001 6 11, 조선족 형제의 밀고로 4 사역 도중 그와 그리고 당시에 함께 있던 76명의 지체들이 모두 체포된 . 그러나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그는 남들같으면 년은 족히 감옥에서 있어야 상황인데도 며칠만에 풀려나게 됐다.



그후 그는 추방돼 눈물과 아쉬움 속에 4 사역은 중도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고별하며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하나님, 이제 이들과 헤어지면 다시는 돌볼 없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들을 붙드셔서 이들이 있는 곳곳마다 영광을 받아주시고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드리며 평안을 얻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3 간의 파란만장했던 사역 기간 동안 지쳐있던 영과 육을 회복시키며 요양하고 있던 그에게 사건이 있고 나서 1 뒤에 그가 가르쳤던 탈북자 남한에 들어와 있던 50 5명이 그에게 찾아왔다. 남한에 들어와서 자유와 소유를 얻은 기쁨에 교회도 떠나 흥청망청 살던 이들이 결국 삶의 공허함을 느끼고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자 그를 찾은 것이다.



"자유의 기쁨에 들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결국 남한에서 곳도 없고 살아갈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정부 지원금으로 살았지만 그들 안에는 여전히 말씀이 살아있으니 괴롭기도 했을 겁니다. 마침 저도 북한 선교에 대한 열정이 여전했던 터라 뜻이 맞아 열방빛교회를 세우게 됐습니다"


[꺾이지 않은 북한 선교의 열정과 비전]



그는 지금 성전 이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노원구와 양천구 주변에 많이 모여 있는데 현재 교회가 전철로 2시간 거리인 금천구에 소재해 있어 교회에 찾아오기도, 심방을 가기도 힘든 상황이기 때문. 하지만 그보다 이유는 탈북자들이 밀집돼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싶어하는 그의 욕심이다. 특히 이전 후에는 북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영어와 중국어도 교육할 계획이다.



"우리 교회는 '서울 안의 평양'입니다. 전도도 하지만 탈북자들의 한국 적응을 돕는 것을 병행하고 있죠. 비록 선교 일선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또다시 북한 선교를 맡겨주시니 열정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2기생들을 훈련시키던 중에 하나님께 5000명의 북한 출신 선교사를 양육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도 비전은 꺾이지 않았다



"통일이 되거나 북한이 개방을 하면 수천 개의 교회가 북한에 세워지게 겁니다. 그럼 그들에게 누가 복음을 전할 있을까요? 미국도 한국도 아닙니다. 북한을 가장 알고 그들 가슴 깊이 예수의 이름을 심을 있는 사람들은 오직 북한 사람 자신들 뿐입니다"



역경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인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최광 선교사. 그런 감사함이 넘쳐서인지 어느새 쉰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아닌 기쁨의 광채가 흘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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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선교는 현지선교사가 하는 것이 선교의 원칙이듯이 북한 선교는 북한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통일 후에 북한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문화적 이질감은 물론 사회주의 사상에 젖어 있는 북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은 장벽입니다. 북한 사람을 가장 이해하는 사람은 북한 사람들입니다. 북한 사람들을 훈련시켜 그들로 하여금 북한을 복음화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북한선교전략입니다."


최광 목사는 1998 8월부터 2001 6월까지 3년간,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재우고 먹이면서 북한선교사 양성 사역을 했다. 1997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워 2백여 명이 죽었다. 최광 목사가 북한선교사 양성을 하게 것은 1998 신학교 3학년 때에 단기선교를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중국 길림성에서 처음 만난 북한 특수부대 출신인 주광호 선생과 4명의 탈북자들을 만났습니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그들은 굶주림에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놓고 20 동안 오직 성경통독과 기도만을 시켰습니다. 믿음도 없는 그들이었지만 밖으로 나가면 굶어죽거나 잡혀가는데 먹여준다는 때문에 그렇게 성경읽기와 기도를 따라했습니다. 그것이 사역의 시작이었습니다."

최광 목사는 당시 신대원 졸업 3개월을 남겨둔 상태였다. 하지만 단기선교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 그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몸이 아픈데다가 마음마저 울적해져 박베드로 선교사에게 상의했다. 선교사는 그에게 년만 휴학하고 북한 선교를 것을 권했다. 목사는 제안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중국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자 곤고했던 마음 상태도 사라지고 아팠던 몸도 거뜬해지는 체험을 했다.

그가 다시 중국의 사역장에 도착했을 이유를 알았다. 단기선교 만났던 북한 형제들이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이다. 그래서 목사의 방문에 그들은 기도의 응답에 신기해했다. 그는 단기선교 경험을 토대로 이들에게 선교사 양육을 위한 사역을 고민해야 했다.

"북한이 개방되었을 북한교회의 모델은 중국입니다. 중국은 개방을 하고 나서 달러를 벌기 위해 예배당을 짓게 했고 설교는 중국인만 있게 제한했습니다. 북한도 충분히 그럴 있다는 생각에 북한선교사를 북한인으로 세우면 북한선교에 아주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구나 당시 중국의 북한선교는 한두 만나고 그들에게 예배와 양식을 공급하고 돌아가는 형태였습니다. 이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려는 시도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목사는 단기선교의 경험을 그대로 적용했다. 동고동락 속에 모든 생활과 사역을 함께 하고 100% 공개하기로 것이다. 새벽부터 저녁 잠자리에 때까지 기도와 성경을 읽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보통 사람도 배겨나기 힘든 과정을 이들에게 적용한 것은 이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에 물들어 버린데다가 중국에서 오직 생존을 위한 생활습관으로 뭉쳐진 북한사람들의 마음을 녹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먹고 재워준다는 것이 고마워서 내가 하는 프로그램에 동참했지만 이들의 속내는 다른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술도 담배도 피우지 못하게 하고 하루 종일 안에 있게 하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결국 10개월 동안 14명중에 6 떨어져 나갔고 8명을 북한선교사로 세웠습니다."

서로를 존경할 모르는 이들에게 존칭어를 쓰게 하는 , 자신의 일은 물론 다른 사람을 돕게 하는 , 부엌일을 가르치는 하나하나가 그들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목사는 중국공안의 눈을 피해 집을 여러 곳으로 옮기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또한 야생마 같은 이들을 순한 양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성경을 통독한 5개월 가까이 되자 위력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때가 신약 60, 70, 구약 10 , 그리고 말씀도 200~300 가량 암송할 때였다. 목사는 이때부터 집중해서 회개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고백하는 시간을 일주일을 시키자 서서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북한이나 중국에 살면서 죄라는 죄는 짓고 살면서도 번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신은 죄인 중에서도 으뜸 죄인이라고 깨닫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죄를 깨끗케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회개가 터지고 기도 시간마다 울음바다가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때문에 근심하며 슬퍼서 눈물 흘리더니, 며칠이 지나자 자신의 죄를 사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길거리 거지를 만나면 돈을 쥐어주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더구나 북한 선교를 자신들이 하겠다고 결심하고 ' 조선에 예수의 피를 뿌립시다' 순교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변화되어도 완전히 변화된 이들에게 목사는 사역자로 있는 교육을 시작했다고 한다. 성경을 읽기만 것이 아니라 신학적 틀을 세워주고 지도자로서 있는 교육을 것이다. 설교할 있도록 돕고 사역을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순번을 정해 재정과 설교 모든 것을 맡기는 훈련도 했다.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졌다. 8명이 신약 성경 100~200, 구약성경 20~30, 말씀 300절에서 1~2 절까지 암송하게 되었다.

제자가 다시 제자들을 불러서 그들을 양육하는 교육원리를 접목해서 1999 4 7, 북한 선교사 8명을 연변으로 파송해 53명의 북한 형제들을 직접 모집하였다. 이들이 중국 중동부인 산둥성, 제남과 하남성 정부 중서부인 사천성 성도와 중경에서 사역장을 꾸리고 1 동안 23명의 새로운 북한 선교사들을 양육하였다.

"이런 원리로 북한선교사 5 명을 세울 생각을 했습니다. 통일이 되면 적어도 5 명의 북한출신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2 20명의 선교사들이 2000 4월에 다시 연변으로 파송되어 130 명의 학생들 모집했습니다. 이들을 통해 50 명의 3 선교사들을 양육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우리의 계획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4 생을 모집했을 무렵 2001 6 11 오후 6 30분에 나를 비롯한 76명이 중국 공안과 군인들에게 체포되고 59명이 북한으로 이송되었습니다."

3년의 사역에 목사는 거의 탈진이 되었다.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갈 그의 손에는 단돈 4만원이 있었다. 모든 재정은 하나님께만 아뢴다는 원칙을 그는 그대로 믿고 따랐다. 잡히지 않기 위해 그가 관리한 사역장은 수시로 옮겨야 했다. 공안원이 들이닥치면 성경책만 들고 야반도주하다 일이 자주 일어났다. 나중에 일부 북한선교사들은 붙잡혀 북송되어 그곳에서 순교했다. 위험한 상황 가운데 그는 그저 하늘만 바라보면서 사역을 했다남한에 두고 가족들도 나중에 중국으로 합류해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고 한다. 자녀들이 학교도 다니지 못할 만큼 재정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 눈물로만 아뢰었던 목사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책임지신 것을 보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추방된 뒤에 몸을 추슬러 건강이 회복되고 다시 힘을 얻게 되었을 중국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비자 신청을 거부당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중국에 다시 들어갈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함께 했던 350 명의 형제자매들이 한국으로 귀순하여 내게 연락을 했습니다. 처음에 귀를 의심했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이들이 북한에서 다시 탈출해서 남한으로 와서 나를 만난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서안에서 함께 체포되었던 79 중에서는 59명이 북송되어 20 명이 다시 기적적으로 재탈북하여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들 중에 대학교에 들어간 이들도 있고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교육을 받는 이들도 있다. 목사는 이들과 함께 열방빛선교회를 세웠다. 북한선교는 물론 이슬람 선교를 위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북한선교를 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했다. 북한선교사를 세워 이들이 선교사를 양육할 몸무게가 15kg, 20kg 빠질 만큼 어렵다고 했다.

그는 북한 사람의 사고 체계는 외국인보다 심한 외계인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문화적 이질감이 심했다고 했다. 전혀 다른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품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새로운 시각으로 북한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최광 목사의 생각이다. 최광 목사는 9월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북한 선교를 꿈꾸고 있다. 얼마 전까지 번에 걸친 비자 신청이 모두 거절당했다. 그는 이제 호적을 바꿔서라도 중국을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다. 스스로 탈남자가 되고자 베트남을 통한 중국을 행을 꿈꾸기도 했던 최광 목사는 북한선교사 양육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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