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은혜동산 팀멤버와 기도후원자들을 위해 만들었습니다. 은혜동산 사역 전반에 대해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함완구 전도사(714.345.2274 wk.hahm@gmail.com) 또는 신장섭 피택장로(626.712.3161 shinnpeter@gmail.com)에게 문의하십시오. Post 많은 관계로 제일 아래 Older Posts Click하시면 많은 내용을 보실수 있습니다.

Sunday, October 28, 2012

은혜동산 3기 기도모임



매주 은혜동산 3기를 위한 기도모임을 갖습니다. 여러 교회행사로 분주하지만 큰 사역을 앞두고 그 어느때보다 기도가 절실히 필요하기에 팀멤버로 참가하실분들과 중보기도자 여러분들은 꼭 참석하여 주십시오. 

Sunday, October 14, 2012



Click하면 이미지를 크게 보실수 있습니다.

















10 13 토요일 오후 730, GKC 5 선교회의실에서 한기홍 목사님을 모시고 은혜동산 임원회의를 가졌습니다. 준비를 시작하는 내년 1 28일의 은혜동산 3기와 앞으로의 사역방향, 그리고 주님께서 지금까지 어떻게 인도하셨고, 현재 어떻게 역사하고 계신지 전반적으로 말씀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날 한기홍 목사님은 (요한일서 5:14)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란 말씀으로 모든 사역을 감당할 때 우리 모두 주님의 뜻대로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다시한번 사역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은혜동산 사역이 단순히 새터민들을 위한 Tres Dias 미약하게 시작되긴 했지만, 복음으로 남북한 통일을 이루기 원하시는 주님께서는 계획속에서 이미 한국내 많은 교회와 단체들과 연합하여 사역을 감당할 있도록 모든것을 예비하셨고,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차근 차근 보따리를 풀고 계심을 느낄수 있습니다지난 목요일에 시작된 쥬빌리 통일구국기도회 역시 아직 전체 그림이 확실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주님께서 그리고 계시는 한반도를 향하신 큰 그림의 퍼즐 조각이 하나 하나 맞춰져 가는 과정의 하나라 생각하니 가슴이 설레입니다. 

앞으로 매주 목요일 8시에 모여서 1시간씩 가질 쥬빌리 통일구국기도회에 참석해 주시고, 은혜동산 3기를 위한 팀멤버 모임을 11월 1일 목요일부터 쥬빌리 기도모임 전 7시에 비젼센터 223호에서 갖도록 하겠습니다. 

자세한 소식은 본 블로그에 올리겠습니다. 

Thursday, October 11, 2012

황금종 교회 최광 선교사님의 편지




할렐루야~~~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와 사랑이  집사님의 가정과 은혜교회 위에
항상 함께 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좋은 제목들 주셔서 감사합니다.

책은 지금 교정을 마무리 하고 있습니다
1-2 내에 영어 번역에 들어   같습니다.
번역되는 책을 통하여 많은 분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계기가   있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집사님 가족을 귀한 동역자로 묶어주시고 많이 기도해주셔서
 감사하고있습니다.

 연락 드리겠습니다.

샬롬~~~

  선교사 올림

황금종 교회 김순덕 전도사님의 편지


할렐루야!!
이곳의 날씨는 청명한 가을 하늘!!  이런 날씨가 흔치 않을 정도의 기분좋은 날씨입니다,
주님 안에서 평안하시지요?
이곳 황금종교회 식구 모두 지내고 있습니다.
젊은 청년들도 많이 변화 되어지고 있는 모습에 감사합니다다. 이번 화욜 기도는 관악산정상까지 올라가 기도했어요.

사랑하는 집사님!!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사랑해요. 샬롬!!!

Saturday, September 29, 2012

北 억류됐던 美기자 “北 주민에 미안하다”




2012-09-28 15:13:00


로라 링, 은혜한인교회에서 있었던 탈북 다큐멘터리 상영회에 참석


"그 끔찍한 곳에서 아직도 사는 북한 주민들에게 늘 미안한 마음입니다."

지난 2009년 두만강 중국-북한 국경에서 북한군에 붙잡혀가 140일 동안 억류됐던 미국 언론인 로라 링(35) 씨가 모처럼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링 씨는 27일 (현지시간) 미국 캘리포니아주 오렌지카운티 풀러턴의 은혜교회에서 탈북자가 만든 탈북 다 큐멘터리 영화 '48M' 상영회에 참석했다.

건강하고 쾌활한 모습의 링 씨는 연합뉴스 특파원에게 "북한에 붙들려 있을 때 받았던 정신적 충격은 이제 많이 가셨다"면서도 "한동안 미국에 돌아와서도 악몽에 시달려서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당시 두만강 중국 쪽 영토에 있었지만 북한군 병사 2명이 달려와 북한 쪽으로 강제로 끌고 갔다고 밝힌 링 씨는 북한군이 저항하는 자신을 마구잡이로 때린 바람에 실신했고 눈을 떠보니 북한군 병영이었다고 설명 했다.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없지 않았지만 이런 곳에서 평생을 살아가는 북한 주민 생각 에 참고 견디자고 스스로 채찍질했다고도 했다.

링 씨는 "북한에 억류되기 전에 이미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만나 취재해서 그들이 겪는 처참한 상황을 잘 알 고 있었다"면서 "나는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됐지만 북한 주민은 여전히 끔찍한 인권 탄압 속에 남아 있다는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든다"고 말했다.

특히 링 씨는 "중국에서 성매매로 생계를 잇는 탈북자 여성을 인터뷰했을 때 북한에 도로 잡혀갈까 봐 극도 로 불안해하더라"며 "중국은 탈북자를 북한으로 강제 송환해서는 안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북한의 처참한 인권 상황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다"는 링 씨는 "북한 주민의 인권 상황을 개선하는데 도 움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

중국계인 링 씨는 앨 고어 전 미국 부통령이 설립한 커런트TV 기자로 일하던 2009년 3월 동료인 유나 리 씨 와 함께 중국-북한 국경 지역 취재 도중 북한군에 끌려가 간첩죄 등으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그해 8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한을 직접 방문해 링 씨와 리 씨를 데려왔다.

2010년부터 'E! 채널'에서 기자 겸 진행자로 일하는 링 씨는 학교 내 왕따 문제와 청소년 자살 등을 주로 다루고 있다고 근황을 소개했다.

탈북자들의 생생한 탈북 과정을 그린 영화 '48M'는 이날 상영회로 미국 내 1차 상영 일정을 마쳤다. 미국 의회 상영회와 로스앤젤레스 한인회 상영에 이어 열린 이날 행사는 이곳이 지역구인 미국 하원의 대 표적 지한파 에드 로이스 의원의 지원을 받았다.



탈북 고아 입양법을 발의하는 등 북한 인권 개선에 관심이 많은 로이스 의원은 상영회에 앞서 "북한 주민이 얼마나 처참한 상황인지 전 세계에 널리 알려서 결국에는 인권 탄압이 중단되도록 해야 한다"면서 "이런 영화가 전 세계에 상영되면 중국도 생각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영화 제작자인 탈북자 안혁 (주)48M 대표는 "미국 의회 상영회 때 영화를 본 미국 하원의원들이 지역구에서 영화를 틀자고 제의해와서 다음 달에 다시 미국에 건너올 계획"이라면서 "플로리다주, 펜실베이니아주 등 서너 곳에서 상영 요청이 들어와 일정을 짜는 중"이라고 소개했다.

(로스앤젤레스=연합뉴스) 





탈북자들의 탈북 과정에서 겪은 생생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48M>가 지난 19일(현지시간) 대한민국 영화로는 최초로 미국 하원 특별시사회에서 상영됐다.

미 하원 레이번 빌딩에서 상·하원 의원 다수와 보좌진,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취재진이 참석해 이례적인 관심을 보였다. 영화 <48M>는 북한 주민들의 처참한 실태와 탈북자들의 필사적인 탈북 과정에 얽힌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담아내 영화를 관람한 참석자들을 충격에 휩싸인 채 숙연하게 만들었다. 

영화 제목 <48M>의 48m는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대인 북한 양강도와 중국의 장백현 사이를 흐르는 압록강의 최단거리를 의미한다. 영화는 세계적인 이슈로 대두되고 있는 탈북자와 강제북송 문제,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자행되고 있는 북한의 인권유린을 고발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북한자유연합 수잔 숄티 대표는 "영화의 내용이 너무 파워풀해서 할 말을 잃었다"며 "우리와 동일한 인간애를 갖고,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건 탈출을 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잔인한 상황들이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미 의회 내 대표적인 지한파인 에드 로이스 하원의원(캘리포니아)은 직접 행사장에 나와 영화의 의미를 설명하고 자신이 지난해 4월 발의한 탈북 고아 입양법안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또한 2007년 일본의 거센 반대 로비에도 불구하고 미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 채택에 앞장선 고(故) 톰 랜토스 의원의 부인인 아네트 랜토스 여사도 참석해 자리를 빛냈다. 이 밖에도 미 의회 주요 인사들과 많은 인권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해 탈북자들의 암담한 현실과 북한의 무자비한 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며 영화 <48M>에 대한 높은 관심을 드러냈다. 

영화제작을 맡은 (주)48M의 안혁 대표는 "수많은 탈북자가 왜 목숨을 걸고 탈북할 수밖에 없는지를 잘 말해주는 영화"라며 "처절한 삶에 대해 하소연하지 못하는 탈북자들의 외침을 전하기 위해 직접 워싱턴까지 오게 됐다"며 벅찬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3년간 수감 생활을 하기도 한 안 대표는 "이 영화를 만들려고 지난 3년간 탈북자 300여 명과 가족들을 인터뷰했고, 그 가운데 대표적인 사례를 모아 영화화했다"고 소개하며 이 영화의 진정성을 설명했다.  

안 대표 등은 시사회에 앞서 미국 하원에서 '톰 랜토스 인권위원회' 위원장인 프랭크 울프 의원이 주최한 청문회에 참석해 북한의 실상과 탈북자 실태 등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이 청문회에 참석한 박광일 목사는 증언에서 "북한 주민들에게, 탈북자들에게 자유를 찾아주기를 진정으로 호소한다"고 말했다. 그는 1998년 탈북했다가 중국 공안에 체포돼 북송된 뒤 60일간 잔혹한 고문해 시달렸던 탈북자이다.

영화 <48M> 대표단을 비롯한 여러 인권단체들은 제4회 탈북자의 날(9월 22일)을 맞아 현지 한인회를 중심으로 영화 시사회를 진행하고 있으며 중국대사관에 강제북송 중단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제출하는 등 탈북자들의 인권 유린 실태를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대대적인 북한인권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 13일에는 스위스 제네바 유엔 인권위원회에서 각국 대사와 인권위원회 대표, 비정부기구(NGO)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48M> 특별시사회를 열어 세계 각국에 열악한 북한 주민들의 실태와 김정은 독재정권을 규탄하는 목소리를 드높였다.

한편, 영화 <48M>는 박효주, 이진희, 김광현, 하석 등이 출연하며 하반기 개봉을 예정하고 있다. 



[여성시대] 영화 '48M' 에 담긴 탈북자들 생존의 몸부림

2012-09-20
안녕하세요? 여성시대 이원희 입니다. 9월22일 4회 탈북자의 날을 맞아 미국의 워싱턴 디시를 비롯한 전세계에서 대대적인 북한인권 운동을 진행 하면서 그의 일환으로 탈북자들의 생생하고 사실적인 탈북과정을 그린 영화 ‘48 M’ 시사회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영화는 19일 미국 의회에서 특별 시사회를가졌고 그 전날 18일에 영화 제작을 맡았던 탈북자 미국 방문단이 RFA, 자유아시아 방송을 찾아 영화 얘기를 나누었습니다. 

Cut: 여성들의 보편적인 삶의 가치를 위한 생존의 몸부림 이런 내용을 비롯해서 다양한 얘기들이 전개 되고 있습니다. 

여성시대, 오늘은 영화 ‘48M’ 제작에 함께한 박광일 홍보 본부장의 얘기 들어봅니다.

영와 사운드: 야, 여기서 저기가 멀만데 저쪽에서 얼굴이 보인다고 그러니…/ 아 여기서 저기 까지가 48 미터입니다. 왜 안보입니까? 

영화 제목 48 M은 많은 탈북자들이 목숨을 걸고 건넜던 북한과 중국의 국경 사이의 가장 짧은 압록강 폭 의 길이 입니다. 압록 강변 혜산 쪽 에서 살던 탈북자들의 주요 통로 였었는데요. 가장 짧은 거리 이것이 바로 생사의 갈림길인 겁니다. 박본부장의 말을 들어보죠 


박: 북한 쪽으로 24미터 중국쪽으로 24미터 해서 48미터 입니다. 깊이는 아주 얕고 사람이 그냥 건널 수 있는 깊이죠.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식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식들을 안고 48미터의 강폭을 거너다가 다 총에 맞아 죽어요.


사운드: 총성 


그렇게 시작됩니다. 

사운드: 아버지 중국 간다고 했지? / 네? 무슨 말 입니까? 어디서 그런말 들었었습니까? 나 그런 말 한적 없습니다. /네 아버지 병 고칠 수 있다/ 우리 아버지 거기 못 가면 죽습니다. 


박: 앓고 있는 아버지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 탈북을 시도 하는 딸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 딸의 이소원은 물거품으로 끝나게 됩니다 . 이는 그 딸의 남동생이 바로 48미터 국경을 지키고 있는 북한 경비대원이기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자신의병 보다는 아들의 앞날을 위해서 딸의 탈북을 북한 당국에 고발하고아버지는 자신이 독약을 먹고 죽는 가슴 아픈 현실이 담겨져 있습니다. 


압록강변에 있는 혜산은 강폭 48미터에 비가 내리지 않을 때는 30미터도 안되는 곳이 많고 겨울이면 강물이 두껍게 얼어 붙어 중국으로 아주 쉽게 건너 갈수 있는 곳 이라고 하죠. 이런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일찍부터 중국과의 밀무역 과 탈북자들이 성행했고, 한집 건너 탈북자들이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탈북자가 많았던곳 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북한정권으로 부터 혹독한 탄압과 감시를 받기도 했었는데요, 또 혜산을 통해 탈북하면 지린성 창바이를 거쳐 옌지 까지 빠져 나와야 하는데 이 탈출길이 외통길이라 중국의 공안 당국의 단속에 걸릴 위험도 크다고 이곳을 통해 탈출한 탈북자들은 말합니다. 하지만 북한 경비대들은 이들을 향한 총질은 계속된다고 하는데요,


박: 탈북하는 탈북자들을 향해서 북한의 경비대원들이 사살하는 내용, 북한에서 쏘는 거죠. 


박 본부장은 이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제작팀이 많은 조사와 준비 과정을 통해 탈북자들의 탈북 실태를 사실 그대로 담았다고 밝힙니다. 


박: 저희가 한 290여명의 탈북자들을 3년전 부터 인터뷰를 했어요. 그래서 거기에서 가장 리얼한, 아주 사실적인 얘기를 30개 정도 뽑았습니다. 30개 스토리를 제작진들이 많은 논의를 해서 7개를 선정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48미터라는 국경 압록강 폭을 놓고 탈북을 시도하는 7가정의 얘기가 다양하게 엮어서 전개가 되는 영화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탈북자들의 탈출을 주제로 한 영화, 뮤지컬 즉 음악극, 수기등의 책 들도 많이 나왔는데 다른 점은 하나의 주제가 아닌 다양한 주제를 다룬 것이라고 하네요. 


박: 지금까지는 북한인권 영화나 북한 인권을 주제로한 뮤지컬 같은 경우는 하나의 사건 하나의 얘기를 다루었다면 이번 영화 48M은 다양한 스토리를 가지고 북한의 인권 실상을 가장 실질적인 면에서 잘 보여 줄 수 있는 대표적인 유형의 사례들을 종합적으로 48미터라는 하나의 국경을 놓고 보여 주고 있다는 거죠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 탄탄한 스토리 구성으로 재미 있는 영화보다는 탈북자들이 생사를 넘나들던 순간 순간에 생생하게 촛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박:스토리가 굉장히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어요 . 재미 있다기 보다는 리얼합니다. 


탈북자들의 70% 이상이 여성들이기에 여성 문제도 아주 심도 있게 실제적인 면을 잘 드러내고 있다는 데요,


박: 엄마와 딸이 아버지가 굶어 죽었어요 그래서 엄마가 딸을 살리기 위해서 딸을 데리고 탈북을 시도합니다. 그런 탈북을 시도하는 과정속에서 딸이 죽게됩니다. 그러자 엄마가 미칩니다. 그런 사례, 그리고 임신한 임신부가 탈북을 하기 위해서 대기하고 있다가 그 안에서 죽어요. 이렇게 여성들의 보편적인 삶의 가치 를 위한 생존의 몸부림 아주 다양한 얘기들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탈북자들을 주제로 한 영화나 책, 모두 탈북자들의 인권 그리고 북한의 참담한 인권실상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는데요 이번 48M 영화 또한 북한의 인권 실상을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알리는 것이 영화 제작의 목적이라고 박 본부장은 강조 합니다. 


박: 저희가 상업적인 목적으로 만들었다면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만들었을 텐데요, 북한인권을 알리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최대한 가장 리얼한 , 실제적인 사건에 초점을 맞추어 많이 넣자, 저희가 이 48M를 가지고 많이 알리자는 측면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재미는 없다고 해요. 보고는 아주 사실이다, 너무 사실적이다 그래서 북한 인권을 알리는데는 굉장히 중요한 하나의 수단이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탈북자들의 많은 사건들이 그 국경지역에서 일어나는 현실을 통해서 김정은 정권 아래에서도 북한인권 문제는 계속된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고 박 본부장은 덧붙였습니다. 

이 사건은 북한 체제 에서 탈북이라는 그러한 탈북자의 역사가 시작되면서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던 이런 모든 유형의 사건들이 다 들어가 있기 때문에 북한인권을 알리는데는 좋은 영화라고 봅니다. 

탈북 청년들이 새로운 토양에서 내일에 대한 꿈과 희망의 나래를 펴기위해 만든 단체, ‘북한민주화 청연 포럼’의 대표이기도 한 박 광일 본부장은, 북한에서 부유한 가정에서 자라나 한국의 드라마 ‘모래시계’ 비디오를 구입해 보고 권력층 자제들인 친구들에게 빌려준 것이 발각되어 탈북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중국 공안에 잡혀 북한 보안부로 끌려 갔던 박 본부장은 상상도 못한 고문을 받았다고 하는데요, 그러다 다른 곳으로 이송 되던 중 달리는 열차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살기위해서가 아니라 죽기 위해서였던 것이라고 하는데요, 하지만 기적적으로 살아나 다시 탈북합니다. 중국에서 한국인 선교사를 만나 자신의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신앙의 확신을 갖고 한국에 들어가 신학 과정을 거쳐 지금은 목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박: 저는 두만강 쪽으로 건너서 왔고요, 제가 48M 에서는 기독교 박해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제가 그 부분을 담당 했습니다. 그래서 48M는 제가 시작부터 같이 해왔습니다.


영화 사운드: 내 꼭 살아 가지고 내 아들 한번 보고 죽겠습니다. 

바지와 치마를 넙적다리 위까지 걷어 부친채 죽음의 공포에 떨었던 탈북자들은 그래도 한줄기의 꿈과 희망을 품었기에 48M의 물속을 뛰다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건널 수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여성시대 RFA 이원흽니다.

Tuesday, September 11, 2012

북한 복음화에 일생을 건 최광 선교사님


"하나님 저는 지금까지 정말로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누릴 누리고 살았으니 이제부터는 먹고 입고 쓴다 할지라도 저는 만족합니다. 이제 저의 남은 생명은 북한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최광 선교사. 북한 선교에 서원하며.)

열방빛교회는 지난 2003 4 11 탈북자들이 주도해 세우게 됐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에서 정처를 찾지 못해 할일없이 교회로 모여드는 여느 탈북자들과는 달랐다. 이들 하나하나가 북한 선교와 탈북자 선교에 비전을 품고 말씀으로 무장된 하나님의 강한 군대였다. 그리고 그들의 중심엔 이들과 3 이상 동고동락하며 삶과 말씀으로 예수를 증거한 최광 선교사(49) 있었다.



[북한 선교의 시작]



선교사는 신대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98 8 8 중국땅에 발을 내디뎌 우연히 탈북자 5명과 합숙하며 함께 말씀을 묵상하게 되면서 뜻하지 않던 탈북자 선교를 시작했다. 개강 준비를 위해 한국에 돌아왔는데 몸과 마음이 그렇게 힘들더란다. 그래서 1년만 휴학하고 북한 선교를 해보라는 선교사의 권유로 그는 다시 중국땅을 밟게 됐다.



"그런데 중국으로 돌아가 탈북자 형제들을 만나 얘길 했더니 글쎄 사람들이 배를 잡고 웃는 겁니다. 알고 보니까 자기들이 제가 다시 돌아오도록 금식 기도를 했다는 거에요.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같은 공간에서 먹고 자고 생활하니 신뢰가 간다나요. 쫓기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다 보니 동고동락 해주는 좋았나 봅니다"



1년으로 잡았던 선교 기간이 2년이 되고 3년이 됐다. 기간동안 그는 완전히 북한 사람들에게 빠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됐다고 고백했던 바울처럼 그는 선교 기간동안 성격도 말투도 북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제가 전도한 이들은 저를 '수령님'이라고 농담을 하기도 합니다"라고 말하며 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친근하면서도 확고한 모습으로 복음을 전해 .


[오직 말씀의 능력으로]



선교사의 전도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성경을 신약은 하루에 걸쳐, 구약은 사흘에 걸쳐 일독하는 속도로 10개월 동안 신약 100, 구약 20, 성경구절 500 암송을 하고 남는 시간 동안은 기도하는 맹훈련을 시킨다.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어렵고 악한 환경 가운데 살아왔기에 잔인하고 무자비하던 그들이 놀랍게 변화된다는 .



"그들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기에 쉬는 시간을 주면 싸우기만 해서 감당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감당할 방법은 그것뿐이었죠. 그렇게 30~40독을 하고 나니 오히려 자유시간을 줘도 지겹다며 성경통독을 하자고 하더군요. 개월만 그렇게 하면 설교도 다들 능수능란하게 합니다"



98 8월부터 그렇게 훈련받아 성경통독 등의 교육과정을 마친 사람들은 1기가 됐다. 선교사는 이들을 내보내 각자 탈북자들을 전도해서 2기를 양성하고, 이들이 3, 4기를 양성하게 하며 사역을 확장해나갔다. 그렇게 해서 어느새 그의 장막엔 350 명의 사람들이 1기부터 4기까지 350 명의 사람들이 거쳐갔다. 대부분이 확고한 신앙고백을 가졌을 아니라 교육 프로그램도 수료한 믿음의 사람들이었다. 그러는 가운데 그는 많은 이들을 감당하기가 힘에 부쳐 가족들도 중국으로 부르게 된다.


"인간적으로 미안한 생각도 들었지만 하나님의 일이 귀하게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며 가족들도 저를 많이 이해해주었고 기도도 해줬습니다. 4명이나 되는 자식들이 학교를 한창 다니고 감수성이 풍부할 때라 처음엔 힘들어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아이들까지 책임져주셔서 모두 자라나고 있습니다"


[위기와 시련, 그러나 역사를 쓰신 하나님]



그렇게 끊임없이 선교의 장막을 넓혀가던 그들에게 시련이 닥쳤다. 2001 6 11, 조선족 형제의 밀고로 4 사역 도중 그와 그리고 당시에 함께 있던 76명의 지체들이 모두 체포된 . 그러나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 그는 남들같으면 년은 족히 감옥에서 있어야 상황인데도 며칠만에 풀려나게 됐다.



그후 그는 추방돼 눈물과 아쉬움 속에 4 사역은 중도에 막을 내렸다. 하지만 그는 바울이 에베소교회의 장로들과 고별하며 했던 말을 떠올리며 "하나님, 이제 이들과 헤어지면 다시는 돌볼 없게 됩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들을 붙드셔서 이들이 있는 곳곳마다 영광을 받아주시고 이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드리며 평안을 얻고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3 간의 파란만장했던 사역 기간 동안 지쳐있던 영과 육을 회복시키며 요양하고 있던 그에게 사건이 있고 나서 1 뒤에 그가 가르쳤던 탈북자 남한에 들어와 있던 50 5명이 그에게 찾아왔다. 남한에 들어와서 자유와 소유를 얻은 기쁨에 교회도 떠나 흥청망청 살던 이들이 결국 삶의 공허함을 느끼고 다시 신앙을 회복하고자 그를 찾은 것이다.



"자유의 기쁨에 들떠 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결국 남한에서 곳도 없고 살아갈 능력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죠. 정부 지원금으로 살았지만 그들 안에는 여전히 말씀이 살아있으니 괴롭기도 했을 겁니다. 마침 저도 북한 선교에 대한 열정이 여전했던 터라 뜻이 맞아 열방빛교회를 세우게 됐습니다"


[꺾이지 않은 북한 선교의 열정과 비전]



그는 지금 성전 이전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탈북자들이 노원구와 양천구 주변에 많이 모여 있는데 현재 교회가 전철로 2시간 거리인 금천구에 소재해 있어 교회에 찾아오기도, 심방을 가기도 힘든 상황이기 때문. 하지만 그보다 이유는 탈북자들이 밀집돼 있는 지역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을 전도하고 싶어하는 그의 욕심이다. 특히 이전 후에는 북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영어와 중국어도 교육할 계획이다.



"우리 교회는 '서울 안의 평양'입니다. 전도도 하지만 탈북자들의 한국 적응을 돕는 것을 병행하고 있죠. 비록 선교 일선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또다시 북한 선교를 맡겨주시니 열정을 바치고 있습니다"



그는 중국에서 2기생들을 훈련시키던 중에 하나님께 5000명의 북한 출신 선교사를 양육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기도했다. 그리고 지금도 비전은 꺾이지 않았다



"통일이 되거나 북한이 개방을 하면 수천 개의 교회가 북한에 세워지게 겁니다. 그럼 그들에게 누가 복음을 전할 있을까요? 미국도 한국도 아닙니다. 북한을 가장 알고 그들 가슴 깊이 예수의 이름을 심을 있는 사람들은 오직 북한 사람 자신들 뿐입니다"



역경의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인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살아왔다고 고백하는 최광 선교사. 그런 감사함이 넘쳐서인지 어느새 쉰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아닌 기쁨의 광채가 흘러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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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선교는 현지선교사가 하는 것이 선교의 원칙이듯이 북한 선교는 북한사람이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가 통일 후에 북한에 교회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문화적 이질감은 물론 사회주의 사상에 젖어 있는 북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접근하는 것은 장벽입니다. 북한 사람을 가장 이해하는 사람은 북한 사람들입니다. 북한 사람들을 훈련시켜 그들로 하여금 북한을 복음화시키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북한선교전략입니다."


최광 목사는 1998 8월부터 2001 6월까지 3년간,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재우고 먹이면서 북한선교사 양성 사역을 했다. 1997년부터 1998년까지 북한의 식량 사정이 가장 어려워 2백여 명이 죽었다. 최광 목사가 북한선교사 양성을 하게 것은 1998 신학교 3학년 때에 단기선교를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중국 길림성에서 처음 만난 북한 특수부대 출신인 주광호 선생과 4명의 탈북자들을 만났습니다.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한 그들은 굶주림에 살길을 찾아 중국으로 넘어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을 놓고 20 동안 오직 성경통독과 기도만을 시켰습니다. 믿음도 없는 그들이었지만 밖으로 나가면 굶어죽거나 잡혀가는데 먹여준다는 때문에 그렇게 성경읽기와 기도를 따라했습니다. 그것이 사역의 시작이었습니다."

최광 목사는 당시 신대원 졸업 3개월을 남겨둔 상태였다. 하지만 단기선교를 마치고 돌아온 뒤에 그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이유 없이 몸이 아픈데다가 마음마저 울적해져 박베드로 선교사에게 상의했다. 선교사는 그에게 년만 휴학하고 북한 선교를 것을 권했다. 목사는 제안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중국 가는 비행기 티켓을 예약하자 곤고했던 마음 상태도 사라지고 아팠던 몸도 거뜬해지는 체험을 했다.

그가 다시 중국의 사역장에 도착했을 이유를 알았다. 단기선교 만났던 북한 형제들이 그가 돌아오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던 것이다. 그래서 목사의 방문에 그들은 기도의 응답에 신기해했다. 그는 단기선교 경험을 토대로 이들에게 선교사 양육을 위한 사역을 고민해야 했다.

"북한이 개방되었을 북한교회의 모델은 중국입니다. 중국은 개방을 하고 나서 달러를 벌기 위해 예배당을 짓게 했고 설교는 중국인만 있게 제한했습니다. 북한도 충분히 그럴 있다는 생각에 북한선교사를 북한인으로 세우면 북한선교에 아주 효과적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더구나 당시 중국의 북한선교는 한두 만나고 그들에게 예배와 양식을 공급하고 돌아가는 형태였습니다. 이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려는 시도들이 거의 없었습니다."

목사는 단기선교의 경험을 그대로 적용했다. 동고동락 속에 모든 생활과 사역을 함께 하고 100% 공개하기로 것이다. 새벽부터 저녁 잠자리에 때까지 기도와 성경을 읽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보통 사람도 배겨나기 힘든 과정을 이들에게 적용한 것은 이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 말씀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사회주의와 주체사상에 물들어 버린데다가 중국에서 오직 생존을 위한 생활습관으로 뭉쳐진 북한사람들의 마음을 녹이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먹고 재워준다는 것이 고마워서 내가 하는 프로그램에 동참했지만 이들의 속내는 다른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술도 담배도 피우지 못하게 하고 하루 종일 안에 있게 하는 것은 모험이었습니다. 결국 10개월 동안 14명중에 6 떨어져 나갔고 8명을 북한선교사로 세웠습니다."

서로를 존경할 모르는 이들에게 존칭어를 쓰게 하는 , 자신의 일은 물론 다른 사람을 돕게 하는 , 부엌일을 가르치는 하나하나가 그들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목사는 중국공안의 눈을 피해 집을 여러 곳으로 옮기는 일에도 신경을 써야 했다. 또한 야생마 같은 이들을 순한 양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은 성경을 통독한 5개월 가까이 되자 위력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때가 신약 60, 70, 구약 10 , 그리고 말씀도 200~300 가량 암송할 때였다. 목사는 이때부터 집중해서 회개 기도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고백하는 시간을 일주일을 시키자 서서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였다. 북한이나 중국에 살면서 죄라는 죄는 짓고 살면서도 번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생각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신은 죄인 중에서도 으뜸 죄인이라고 깨닫기 시작했다.

"하나님의 역사는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만이 죄를 깨끗케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회개가 터지고 기도 시간마다 울음바다가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때문에 근심하며 슬퍼서 눈물 흘리더니, 며칠이 지나자 자신의 죄를 사해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길거리 거지를 만나면 돈을 쥐어주고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는 모습으로 변했습니다. 더구나 북한 선교를 자신들이 하겠다고 결심하고 ' 조선에 예수의 피를 뿌립시다' 순교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변화되어도 완전히 변화된 이들에게 목사는 사역자로 있는 교육을 시작했다고 한다. 성경을 읽기만 것이 아니라 신학적 틀을 세워주고 지도자로서 있는 교육을 것이다. 설교할 있도록 돕고 사역을 어떻게 이끌어나가야 것인가를 가르치기 위해 순번을 정해 재정과 설교 모든 것을 맡기는 훈련도 했다. 번의 시행착오를 통해 그들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워졌다. 8명이 신약 성경 100~200, 구약성경 20~30, 말씀 300절에서 1~2 절까지 암송하게 되었다.

제자가 다시 제자들을 불러서 그들을 양육하는 교육원리를 접목해서 1999 4 7, 북한 선교사 8명을 연변으로 파송해 53명의 북한 형제들을 직접 모집하였다. 이들이 중국 중동부인 산둥성, 제남과 하남성 정부 중서부인 사천성 성도와 중경에서 사역장을 꾸리고 1 동안 23명의 새로운 북한 선교사들을 양육하였다.

"이런 원리로 북한선교사 5 명을 세울 생각을 했습니다. 통일이 되면 적어도 5 명의 북한출신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2 20명의 선교사들이 2000 4월에 다시 연변으로 파송되어 130 명의 학생들 모집했습니다. 이들을 통해 50 명의 3 선교사들을 양육했습니다. 하지만 사탄은 우리의 계획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4 생을 모집했을 무렵 2001 6 11 오후 6 30분에 나를 비롯한 76명이 중국 공안과 군인들에게 체포되고 59명이 북한으로 이송되었습니다."

3년의 사역에 목사는 거의 탈진이 되었다. 사역을 시작하기 위해 중국으로 들어갈 그의 손에는 단돈 4만원이 있었다. 모든 재정은 하나님께만 아뢴다는 원칙을 그는 그대로 믿고 따랐다. 잡히지 않기 위해 그가 관리한 사역장은 수시로 옮겨야 했다. 공안원이 들이닥치면 성경책만 들고 야반도주하다 일이 자주 일어났다. 나중에 일부 북한선교사들은 붙잡혀 북송되어 그곳에서 순교했다. 위험한 상황 가운데 그는 그저 하늘만 바라보면서 사역을 했다남한에 두고 가족들도 나중에 중국으로 합류해서 함께 지내기로 했다고 한다. 자녀들이 학교도 다니지 못할 만큼 재정적으로 어려운 가운데서 눈물로만 아뢰었던 목사는 나중에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책임지신 것을 보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추방된 뒤에 몸을 추슬러 건강이 회복되고 다시 힘을 얻게 되었을 중국으로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비자 신청을 거부당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중국에 다시 들어갈 궁리만 하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함께 했던 350 명의 형제자매들이 한국으로 귀순하여 내게 연락을 했습니다. 처음에 귀를 의심했습니다. 죽은 줄만 알았던 이들이 북한에서 다시 탈출해서 남한으로 와서 나를 만난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서안에서 함께 체포되었던 79 중에서는 59명이 북송되어 20 명이 다시 기적적으로 재탈북하여 한국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이들 중에 대학교에 들어간 이들도 있고 신학교에 들어가 목회교육을 받는 이들도 있다. 목사는 이들과 함께 열방빛선교회를 세웠다. 북한선교는 물론 이슬람 선교를 위한 새로운 사역을 준비하고 있다. 그는 북한선교를 하는 것이 생각처럼 쉽지 않다고 했다. 북한선교사를 세워 이들이 선교사를 양육할 몸무게가 15kg, 20kg 빠질 만큼 어렵다고 했다.

그는 북한 사람의 사고 체계는 외국인보다 심한 외계인이라는 생각이 들만큼 문화적 이질감이 심했다고 했다. 전혀 다른 세상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품기 위해서는 한국교회가 새로운 시각으로 북한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 최광 목사의 생각이다. 최광 목사는 9월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의 사역에 대한 이야기를 <내래 죽어도 좋습네다>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는 여전히 북한 선교를 꿈꾸고 있다. 얼마 전까지 번에 걸친 비자 신청이 모두 거절당했다. 그는 이제 호적을 바꿔서라도 중국을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다. 스스로 탈남자가 되고자 베트남을 통한 중국을 행을 꿈꾸기도 했던 최광 목사는 북한선교사 양육에 대한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있다.